어릴 적에는 남들을 웃기는 게 좋았다. 여느 어른들이 다 그러하듯이 꼬맹이가 재롱을 부리는 걸보고 칭찬과 덕담 한마디 씩 해주는걸, 내 딴에는 '소질이 있어서 그런가?'싶어 개그맨이 될 거라는 생각 했다. 방년 5세의 일이었다.
조금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요리에 관심이 생겼다. 그때 당시, 저녁 10시 정도에 요리 채널에서 '제이미 올리버의 키친'을 방송해줬었다. 제이미는 쉴 새 없이 떠들면서 요리를 완성했고 항상 마지막에 도착한 지인들과 행복한 식사를 했다. 그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었고, 그러다 보니 볶음밥 조차도 못하던 나의 꿈이 막연히 요리사로 정해졌다.
그로부터 조금 더 컸을 때, 으레 과학의 날이면 열리던 교내 글라이더, 물로켓, 전자키트 조립 경진대회에 출전했다가, 운이 좋아 몇 번 입상하게 되었다. 학교 대표로 시대회까지 출전하게 되면서 일찌감치 명예와 관심(?)에 눈뜬 나는, 과학자나 개발자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고등학교 때까지도 이어졌다. 1학년 겨울 방학이 끝나갈 때쯤, 문과와 이과라는 생애 최대 선택을 하기 위해 몇 개월을 고민했었다. 밑바닥을 기는 성적이었지만 국어, 사회가 좋았고 성적도 잘 나왔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부터 어렴풋이 정해진 꿈을 위해서는 전자과를 가고 싶었다. 결국 이과를 선택했고 어찌어찌 잘 풀려 지금까지 개발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장래희망이 자주 바뀌었던 이유는 부모님의 영향도 있었다. 학창 시절에 다들 그러하듯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던 다른 부모님들과 달리,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라고 믿어 주셨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교 4년 동안 배운 전공을 버리고, 다른 분야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리저리 널을 뛰던 장래희망과는 달리, 삶의 목표 1순위는 나의 행복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때문에 꿈이 자주 바뀐 것 같기도 하다. 일이라는 게 항상 재미있고 행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아직 세상 쓴맛을 덜 봤다'며 혀를 찰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목표가 언젠가 변할지라도, 지금 당장 행복과 재미를 위해서 살아가는 게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올해 삶의 우선순위가 조금씩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목표 중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돈'이다. 세상 풍파 맞더니 애가 찌들어가기 시작했냐고? 글쎄.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덧붙여서, 사람이 바뀌기 위해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거나 경험을 해야 한다.
올해가 바로 그랬다. 겨울바람이 매섭던 1월 달에, 2년간 살던 볕 안 들던 좁은 투룸을 벗어나, 꽤 멋들어진 빌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계약을 담당하는 보조 중개사가 여러 차례 실수를 했다. 보증금과 관리비를 잘못 안내하고, 심지어 계약 약속을 잡아 놓고 잠수를 탔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중개비를 줘야 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화가 났지만, 매물이 너무 좋아 보여 그대로 계약을 진행했다. 그때 엄청 따지고 다른 매물을 찾아볼걸 하는 생각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이사하게 된 빌라는 처음에는 좋았으나 살면 살수록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가장 심했던 건 층간/벽간 소음이었다. 소음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한번 소음에 귀가 트이자 돌이킬 수가 없었다. 옆집에는 메모와 함께 편지를 붙여놓으니 잠잠해졌지만, 윗집 발 망치 소리는 4차례나 찾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했다. 결국 백기를 들고 8개월 만에 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집주인과의 트러블이 있었고, 부동산 규제 덕분에 적어진 전세 매물, 복잡한 전세자금 대출 절차 때문에 머리털이 하얗게 변해갔다. 다시 구한집은 꼭대기층이라 층간 소음으로부터 간신히 탈출했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아래층에서 더 큰 소음이 올라온다. 그리고 아랫집 씩씩한 아이는 지금도 운동장을 뛰듯 집안 방방곡곡을 질주하고 있다.
삶의 질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집돌이의 행복한 삶도 이제 다른 나라 이야기 같다. 불과 1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너무 많은 변화가 생겨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정도 체념했다. 환경을 바꾸고 싶어도 나에게 있는 '돈'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올해만 두 차례 이사를 하면서 날려버린 돈이 꽤 되는지라 더욱 마음이 아프다.
이런 경험을 하다 보니 누구에게도 스트레스받지 않는 전원주택이 꿈이 되었고, 그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재력과 능력을 겸비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재미와 행복이 조금 뒤로 밀렸다는 게 씁쓸한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것들을 위해서 지금은 조금 더 다른 곳에 집중하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당분간은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는 일에 집중하거나, 실질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에 투자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야 내가 원하는 전원주택이라는 목표에 조금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제이미 올리버처럼 파티를 할 때 마지막 장면이 민원으로 출동한 경찰 아저씨로 마무리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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