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이야기

커피 못마시는 남자

마스터누누 2020. 10. 19. 00:40
728x90

 

초등학교 4학년, 11살 무렵 이었다. 급식실에 내려가서 밥을 먹고 일어나려면 으레 거쳐야하는 과정이있었다. 바로 선생님께 식판을 검사받는 것. 지구 환경을 위해서 잔반 남기지 않기, 뭐 그런 거창한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선생님의 호된 질책을 피해 매 점심 시간마다 먹기 싫은 음식을 어떻게 꾸역꾸역 먹을까 하는 고민을 했던것 같다.

 

그 당시, 급식 김치는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가뜩이나 싫어하던 김치였는데, 급식으로 나온 김치는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아삭이는 식감도, 신선한 느낌도 없이 왠지 말라 비틀어진 배추로 담근 것 같은, 애매하게 알싸하고 불쾌감만 남기는 식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괴생명체를 덥썩덥썩 곧 잘 먹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에게 느꼈던 감정은, 마치 얼굴에 비누칠을 하고 눈을 뜰 수 있었던 용감한 어린이에 대한 동경과 비슷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 안보는 사이 잔반을 버리거나, 식사를 다하실때까지 기다리던 친구들과 달리, 요령이 없었던 나는 어쩔수 없이 코를 막아가며 음식을 섭취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섭취라고 함은, 당시 상황이 음식의 향과 맛을 즐기는 미식가의 성질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다만 뱃속에 영양분을 채워넣는 행위 였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김치와 사투를 벌이다 보니, 각종 음식 트라우마가 남을 것 같았던 초등학교 4학년의 1년도 금세 지났다.

 

나와 같은 시기를 겪은 학우들 중에서는 오히려 음식에 대한 안좋은 기억이 남았던 케이스도 있었겠지만 나는 달랐다. 무협지에서 각종 독을 복용하다 만독불침(萬毒不侵)이 된 주인공 처럼 모든 하드코어한 음식들을 견뎌 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것이다. 물론 이를 테스트 해보지는 못했고, 실제로 모든 음식들을 다 먹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런 역경을 견뎌 냈으니 '나는 뭐든지 다 먹을수 있어!'라는 마음 가짐과 실제로 가리는 음식이 거의 없었음에 이런 결론을 냈던것 같다. 아무튼, 음식에 있어서는 나도 비누칠을 하고 눈을 뜰수 있는, 당당한 대한민국 어린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튼튼하게 자라난 어린이는 장성하여 어느덧 대학에 가게 되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나에게 20살의 서울은 별 세계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신선하게 다가온 것은 카페의 존재였다. 내가 살던 조그만 시골 동네에서는 비포장의 좁은 농로위에 다방 스티커가 커다랗게 붙은 오토바이가 부지런히도 다녔었다. 카페 보다는 다방이 더 익숙한 우리 동네에는 2020년 지금까지도 카페가 하나도 없다. 반면에 서울은 내가 신입생이던 그 시절 부터, 학교 앞부터 전철역까지 여러 프랜차이즈의 카페가 죽 늘어서 있었다.

 

그 해에는 10cm의 아메리카노가 대학가에 방방곡곡 울려퍼지고 있었고,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 마셔본 커피도 쓰디쓴 1000원짜리 아메리카노 였다. 내가 그 때까지 마셔본 커피라 함은 기껏해야 '맥심 믹스커피'였고, 고급 커피는 '맥심 화이트 모카'였다. 그래서 그런지 씁쓸한 아메리카노의 첫 맛에 꽤나 당황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약 같은 아메리카노를 끝까지 마셨다. 물론 같이 카페에 간 대학 친구들의 시선도 신경쓰였지만, 왠지 한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른의 쓴맛을 견뎌야 한다는 일종의 자기 최면에 걸렸었다. 그 맛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학기가 끝날 쯤엔 커피와 어느정도 친해지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꿈같던 신입생 1년이 끝나고, 복학 시기를 맞추기 위해 12월 쯤 신청했던 군입대 날짜도 확정이 되었다. 나는 입대 준비를 위해 살던 고시원의 짐을 다 빼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시기의 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사회에서의 마지막을 불태우기 위해 피씨방, 술집을 드나들었다. 1년만에 다들 고향에 내려와 있으니 자연스럽게 모임이 잦았다. 카페 유행의 물결은 내가 사는 시까지 영향을 미쳤고, 우리 동네 보다 조금은 번화했던 윗 동네에도 카페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덕분에 술집가기에는 조금 애매한 시간이나 컨디션일때 가끔은 우루루 몰려 카페에 가곤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름은 기억 안나지만 빵과 커피를 팔던 조그만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그 날의 메뉴도, 겨울의 차가운 기운을 따스하게 녹일 따뜻한 아메리카노였다. 이야기가 길어져 늦은 밤이 되서야 친구들과 헤어지고, 우리집까지는 걸어서 3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늦은 밤길을 터벅 터벅 걸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속이 급격하게 쓰리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열이 오르는 것 같았고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살짝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커피를 못먹는 사람들 증상이 그리 심한건 아니라서, 아닌 밤중에 구급차를 부르거나 집까지 기어왔더던지 하는 다이나믹한 추억을 만들지는 못했다. 다만 집에 도착해서 속쓰림을 씻어 내기 위해 생수통을 잡고 물을 벌컥벌컥 마신 것, 자려고 누웠더니 피가 머리에 쏠리는 듯한 느낌, 그리고 몇 시간동안 뒤척였던 것들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것은 아메리카노의 반격, 혹은 배신이었다. '이럴수가! 우린 친구였는 줄 알았는데 왜!' 하는 뻔한 클리셰가 생각 났다. 처음에는 그 집 커피가 이상한가 싶어 몇 번 더 실험을 해봤지만, 그때마다 내 몸은 카페인이라는 이질적인 존재를 완강히 거부했다. 실험을 하는 족족 다 실패로 끝나자 나는 비로소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포스트 논커피 시대가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커피는 기호 식품이기 때문에 대체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장 큰 것은 각성효과이다. 점심만 먹으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사람에게 커피는 특효약이지만 나에게는 독약이었다. 대학 시험 공부를 커피 한잔없이 찬물 세수로만 버텨야했고, 입사 후에도 커피 한잔들고 출근하는 분들이 내심 부러웠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몇 년 간 커피대신 차나 쥬스를 마시다 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좋은 점도 있다. 초면이거나 친하지 않은 분들과 카페를 갔을때 커피를 못 마시는 것으로 대화의 물꼬가 트기도 하고, 가끔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날때면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내 생에 원없이 커피를 콸콸콸 마실수 있는 날은 없겠지만, 어느날 갑자기 나도 모르게 마법처럼 뿅하고 커피를 받아들일수 있는 날을 상상해본다.

728x90